[남미여행] 커피농장 이야기2
-SPn 서울포스트, 박근하 기자
붉은색 머리카락에 투명한 피부, 신비스러운 보랏빛 눈동자...
반팔 티와 팬티 차림으로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마리화나를 피기위해 정원으로 나온 그녀들은 흡사 창녀들의 모습 같았다.
“무슨일이야, 리오? 넘어지기라도 한 거야?”
한 방안에 여러 개의 침대가 있는 도미토리 안에서 여자 친구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뒤따라 나온 데이빗이 놀리듯 게으른 하품을 하며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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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하 서울포스트 |
귀찮은 표정으로 “강간 미수”라는 히브 단어를 던지자 어제 밤 내가 술 마시고 난동이라도 피웠을 것이라 기대했던 이스라엘 녀석들은 순간 몇 걸음 물러서서 내게 등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음... 이건 정말 심한 걸...”
약상자를 들고 와 내 상처를 살피던 로엔은 곤란한 듯 중얼거리더니, 다안에게 약상자를 넘기고 남자들에게 뜨거운 음료 준비를 부탁하더니 밖으로 나가 다른 종류의 붕대를 구해왔다. 이 새벽에 약국이 문을 열었을지도 만무한데 어디서 붕대를 구해왔을까? 어쨌든 15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22살과 24살로 구성되어있는 이 이스라엘 바이러스들의 조직력과 민첩성에 나는 감탄을 했다. 농장 일꾼들과 다른 여행자들은 무시한 채 매일 밤 자정이 넘도록 위스키를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워대던 바이러스들이 아니었던가.
“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알고 있지?”
로엔과 다안은 나를 위로했을 뿐 어제 밤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혼자 쇼파에서 쉴 수 있도록 아무도 내 쇼파를 마주하고 바닥에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던 남자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은 바닥에 앉아 내 쪽으로 연기가 날아가지 않게 조심하며 마리화나를 피워댔을 뿐이다. 마리화나가 통증을 완화시켜 줄 것이라고 다안은 조언했지만, 어젯밤 사고를 겪을 뻔한 나로서는 문제 될 만한 것에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끝낸 그들은 그날의 일정대로 말을 타고 등산을 떠났다. 어제 밤 그렇게 마시고서도... 게다가 한 커플은 손을 잡고 어제 밤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들의 일정에는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트렉킹을 다녀왔던 프랑스 여행기자 플로라는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리오! 오늘 아침에 우리 만났는데도 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말하지 않았어. 알고 있지? 내가 너를 좋아 한다는 거..”
하여간 기자들이란.. 파티를 좋아하는 사교적인 성격의 플로라는 숙소 안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 받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앙숙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Thanks a lot.” (고마워 플로라.)
쇼파에 누워있는 내게 맥주를 권하며 무릎 베개를 자청했던 플로라에게 인사했지만 어제 밤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왜 필요할까에 대해서 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단순히 기자의 본능으로 진실이 알고 싶어서? 그녀의 기사거리로 내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아님 소문거리에 대한 단순 궁금증으로?
이스라엘의 조직력은 놀랍도록 무거워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진실을 알기위한 플로라의 노력이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그 날 저녁 커피 농장 주인은 굳은 얼굴로 나를 찾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고, 마을 녀석들이 술에다 다른 물질을 섞어 좀 더 독하게 먹는 버릇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술을 마신 것은 아무런 잘못도 실수도 아니며, 다만 이 조그마한 마을에서 그런 불명예가 발생했다면 범인을 잡아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내 기분을 생각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플로라와 농장 주인은 이 작은 마을에서 굳이 내 증언 없이도 범인을 찾기 위해 병원과 상가를 이곳저곳 알아보고 있었다. 나는 플로라를 좋아하지 않았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녀가 옳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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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포스트 |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그의 이름도 사실 정확하지 않았다. ‘알렉.....크’ 라는 긴 이름이었던 것 만큼은 분명한데.. 어쨌든 녀석이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술에 취해 행한 충동적인 행동을 나는 폭력사태로 오해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놈이 강제로 껴안으며 옷을 벗기려고 했던 순간들을 분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녀석이 분명한 마음을 먹었던 거라면, 필사적으로 내가 붙잡고 있었던 소년 먼저 위협했겠지... 녀석에게 발길질을 하다가 발목을 다쳤었지만 그게 어느 순간이었는지, 넘어진 것이 먼저였는지 녀석이 나를 풀숲으로 끌고 가려했던 것이 먼저였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산중턱에 세워진 작은 마을에서 내 숙소를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만약 그도 역시 술에 취해 있었다면 내 숙소가 너무 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취해있었다면 마지막 순간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날 수는 없는 일이었겠지.
며칠 후 로엔은 내게 물었다.
“리오! 우리는 내일 다른 도시로 떠날 예정이야.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래? 우린 여행 스타일이 비슷해서 서로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해.”
“고마워. 로엔. 하지만 난 며칠 더 머무를 생각이야. 이제 막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고, 커피 농장 일도 즐거워.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었지만 여긴 위험한 마을이 아니잖아. 또 이곳 친구들이 자기네 젖소농장이랑, 말 농장에 초대해줘서 내일은 소젖을 짜 볼 생각이야.”
“그래 리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우리 이메일이랑 일정표. 앞으로 우리가 머물 숙소 주소를 여기에 남기고 갈께. 또 어제 온 이스라엘 녀석들한테 너를 부탁해 뒀으니 혹시라도 불안한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부탁하면 될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는 좋은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 고마워 로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밤중에 돌아다녔다는 거? 동네에서 알지 못하는 녀석들과 술을 마셨다는 거?
아니다.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작은 마을에는 소박한 사람들이 산다고 단언할 수 있다.
천여명의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아는, 교회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상점이 뻗어있는 평범한 산골마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누구도 여자가 한밤중에 혼자 돌아다니고 마을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위험한 대도시와는 달리 안전하다는 절대적인 믿음에, 동네에서 평판 안 좋은 녀석과 밤늦은 시간 위스키를 잔뜩 마셨다는 것이 내 실수였을 것이다. 안토니오는 알렉카가 평판 안 좋은 녀석이라 내게 주의를 줬지만, 그 역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마을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머물러 있던 며칠 간, 못 배우고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농장 일꾼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에 진심으로 감동받아 버리고야 말았다. 농장의 하루가 끝나면 일꾼들은 나를 위해 오렌지나 레몬을 따다 주었으며, 크리스티나는 커피농장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코카 잎을 섞은 스프를 끓여 주었다. 야드는 수백송이의 꽃으로 내 침대를 장식해줬다. 야드의 로맨틱한 배려에 당황해서 “야드! 너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인건지 알아?”라고 인상을 찌푸렸던 것이 나는 야드에게 두고 두고 미안하다.
로엔 패거리들이 떠나기 이틀 전, 농장에는 또 다른 이스라엘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나에 대한 간단 정보를 로엔에게 넘겨 받았고, 밤새 위스키와 마리화나를 들이키면서도 내가 농장 정원으로 나설 때면 항상 누군가가 길동무와 말동무를 해주곤 했다. 지나친 배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이스라엘의 위스키와 마리화나가 싫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진심으로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무분별한 이스라엘 바이러스들의 민첩성과 조직 의식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약간의 걱정이 들었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내가 외국에서 막 행동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할 뻔 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여자 혼자 외국여행을 다녀서는 안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것이 아닐진대, 아쉽게도 나는 내가 겪었던 사람들의 우정이나 감동, 그 모든 불미스러운 일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들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그냥 넘겨버릴수 밖에 없다. 글로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점점 신파극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고민을 들은 친구녀석이 말했다.
"마음 속 휴머니즘을 표현하지 못하는것이 네 성격의 한계니까 어쩔수 없지. 지금은 그냥 그렇게 써. 너는 네 여행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네 행동에 대해, 네 판단에 대해 결코 어느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언젠가는 여행지에 얻은 우정들과,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형편없는 내 글 솜씨를 탓하면서, 다소 빈약하지만 내 대신에 이야기 결론을 표현해준 친구녀석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박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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